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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2. 17. 23:10 TG삼보컴퓨터소식
그렇게 하면 정말 ‘무지막지’한 거에요”

단어의 취사선택에 따라 상대방 성향을 대략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무지막지’는 몹시 무지하고 상스러우며 포악하다는 뜻이다. 평소 접하기 힘들뿐더러 일반인들이 쉽게 입에 올리지 않는 표현이다. 어감이 거칠고 과격한 탓이다.

안산 삼보컴퓨터(대표 김영민) 디자인연구실에서 만난 김종길 디자인실장은 기자와 대화 도중 이런 거친 단어를 자주 썼다.

그는 지난 6년간 삼보컴퓨터에 몸담으며 ‘에버라텍’의 히트 퍼레이드부터 법정관리란 파국으로 치닫는 순간까지 모든 시련을 함께 한사람 중 한 명이다.
◇사진설명: 삼보컴퓨터 김종길 디자인실장

하마터면 시간 속에 묻힐 뻔한 비통한 기업 드라마에서 그는 잡초 같은 근성으로 버틴 각본이 있었기에 당초 부드러운 말투를 기대하기엔 거리가 있어 보였다.

법정관리에 이른 순간까지 담금질을 하며 디자인 작업에 소홀치 않았던 삼보디자인팀은 ‘루온’이란 브랜드 제품군을 꾸준히 양산하며 디자인에 관한 욕구와 허기를 채워왔다. 애플보다 올인원PC를 먼저 내놓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같은 노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요즘엔 경쟁사가 될만한 중견업체들이 거의 사라졌다”고 안타까워하는 그의 눈빛엔 PC시장에서 대만 및 외산 기업들에게 밀려 좁혀지는 ‘메이드 인 코리아’의 암울한 초상이 비춰지는 듯 했다.

하지만 해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PC업계의 대들보였던 삼보컴퓨터가 지난 과오의 솔직한 반성과 탄탄한 계획으로 실추된 명예회복을 위해 신발끈을 바짝 조여 맨 것이다.

삼보의 사례를 거울삼아 경기침체의 늪에 빠진 중견업체들의 ‘위기해법’을 찾아보도록 하자.
◇자료사진=삼보컴퓨터의 첫 MID 발표회, 도우미들이 MID를 직접 시연해 보이고 있다


“위험 안고 MID를 가장 먼저 선보인 까닭…”
삼보컴퓨터는 최근 국내 처음으로 모바일인터넷디바이스(MID) 상용화 제품(모델명: 루온 모빗)을 전격 공개했다. 이때 반응은 “기존 PMP와 다를 게 없다” “넷북과 사용범위가 중복된다” “UMPC(울트라모바일PC)처럼 반짝 모델이다”라는 등 각 언론과 얼리어답터, IT평론가들의 갖가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MID는 정말 기대 반 우려 반이었어요. ‘지금 같은 불경기에 이 작은 5인치 제품을 위해서 소비자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제 스스로 던지게 됐죠. 하지만 우리에겐 MID는 반드시 갖춰야 될 제품이었어요”

왜일까?

삼보는 이미 넷북(제품명: 에버라텍 버디)으로 제법 재미를 보고 있었다. MID로 리스크를 안을 이유가 없다. MID 시장을 중반까지 관전하다 후발로 참여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대부분 PC제조 업체들의 입장이었다.서두른 감이 큰 MID 발표에 대해 김 실장은 도박판의 포커에 빗대어 설명했다.

“디지털 제품은 설령 실패를 한다 해도 준비와 시도를 게을리 하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기업은 서서히 말라 죽게 되요. 도박판에서 돈을 많이 잃은 사람은 확신이 들 때까지 절대 배팅하지 않습니다. 같이 치는 사람도 그 수를 알죠. 때문에 승부를 가를 패를 잡았다 싶었을 땐 아무도 따라가지 않고 죽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포커에 능한 사람은 불리한 패를 잡아도 과감하게 배팅을 하죠. 바로 이게 디지털시장의 게임 원칙이라고 봐요”

아울러 김실장은 컴퓨터 전문기업이란 명함을 다시 파기 위한 계산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남들과 똑같은 제품을 내놓으면 그게 무슨 전문기업 입니까! 시장의 반응이 기대한 만큼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삼보컴퓨터가 먼저 내놓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저희를 다시 볼 거에요. 브랜드 이미지 재고를 위해 MID는 정말 필수적인 아이템이었죠”

앞으론 디자인만큼 소비자들과 직접 대면하는 제품구매 컨설턴트의 ‘역할론’이 더 커질 것이란 즉흥적인 견해도 밝혔다. MID와 PMP, UMPC와 넷북 등 소비자들의 사용패턴을 더욱 잘게 쪼갠 제품들의 등장이 계속 이어질 것으로 봤기 때문.

“제품을 디자인하다 보면 부서 및 파트 별로 아이템이 겹칠 때가 있죠. 예를 들어 아주 작은 사이즈에 올인원PC를 주문했는데 설계하다 보면 17인치 모니터 디자인과 중복되는 경우가 더러 있어요. 만드는 사람은 물론 쓰는 사람도 이럴 땐 헷갈려요. 때문에 커뮤니케이션 역할을 누군가가 해줘야 합니다. 소비자와 직접 대면하는 커뮤니케이션자의 역할이 앞으로 더 커질 거에요”
◇사진설명: TG삼보컴퓨터 안산공장 전경


‘에버라텍’ 대단원의 막내리나
삼보컴퓨터가 매년 시행하던 소비자 인식조사에서 특이한 결과가 나왔단다. 데스크톱PC부문에서 애플의 맥(Mac) 제품이 디자인 선호도 1위에 올랐던 것. 언뜻 생각하면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김 실장의 설명에 이르면 이 제품의 국내 시장점유율은 타사 제품에 비해 극히 미미하며, 설문조사 참여자 중엔 제품을 직접 본 사람도 드물었단다.

어떤 제품이든 ‘사과 무늬’(애플 로고)만 박히면 ‘콩깍지가 씌어’지는 브랜드 파워와 소비자의 충성도를 나타낸 것이다. 제품을 접하기 전 자기만의 브랜드 선호도가 구매결정에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반증이다.

“가격경쟁을 위해 대만보다 더 낮은 가격으로 만들 수 있는 제조사는 지금 없어요. 삼성과 LG전자가 해외 PC시장의 물꼬를 텄지만 한국 브랜드는 HP나 델, 소니, 애플 등의 막강한 브랜드 외산 업체를 근본적으로 따라잡을 수죠. 우리가 가진 마지막 카드는 디자인뿐입니다”

인텔이 공급하는 공용부품(CPU플랫폼)들로 이젠 성능 측면에서 비교포인트가 무척 애매해 졌다 것이 업계 담당자들의 중론이다. 이 덕에 중국업체들도 우수한 품질의 제품들을 앞다퉈 내놓으며 빠르게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제조사를 불문하고 컴퓨터 성능의 상향평준화가 이뤄진 것이다. 그렇다면 삼보는 경쟁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어떤 특단을 내렸을까? 답은 브랜드 컨셉의 세분화다.

“에버라텍은 원래 실용적이고 편한 컨셉을 강조한 것이나 이젠 그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김실장의 말에 따르면 “삼보엔 하이엔드 제품군이 없나” “여긴 중저가 제품밖에 없나?”라는 인식들이 생겨났던 것. 에버라텍 대단원의 막을 내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상징하는 징후였다.

“당장 기존 이미지를 벗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에버라텍은 미국서 소매기준으로 3~4위를 오가며 소니를 앞지른 적도 있죠. 이전에 ‘드림북’이란 것을 만들었는데 큰 재미는 못 봤어요. 하지만 에버라텍은 꽤 많은 매출을 올려줬죠”

이를 위한 사전 포석으로 삼보컴퓨터는 CI 통합작업에 착수한다. 외부로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상당수 작업이 진전된 눈치다. 트라이젬(Trigem), TG삼보컴퓨터, 에버라텍 등으로 혼용되고 있는 CI의 통합이 내년도 삼보의 숙원사업이다.

“결국 BI(Brand Identity)를 위한 전초전이라고 보시면 되요. 에버라텍의 ‘텍’이란 글자는 기술주도 기업들이 부흥할 때 ‘텍(Tech)’이란 단어를 붙여 회사이름을 붙였던 것처럼 좀 오래된 느낌을 안겨주죠. 디지털 단지에 가면 ‘000텍’이란 회사이름을 흔하게 볼 수 있잖아요.”

사실상 브랜드의 계명은 세분화를 시도하겠다는 말로 풀이된다. 이는 델이나 HP가 기업용 노트북PC와 컨슈머PC의 브랜드 네임을 구분해 가져가는 것과 같은 행보다.

이 같은 추측에 확신을 가지게 한 것은 김실장이 기자에게 조심스레 보여준 내년 1월말 양산에 들어갈 노트북PC의 목각 디자인 때문. “지금까지 에버라텍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미지 제품을 아마 보시게 될 거에요. 가장 톱 클래스에 해당하는 제품이 나올 겁니다”

그때 본 노트북 신제품은 기존 에버라텍과는 다른 혈통의 인상을 안겨줬다. 커버의 헤어 라인 문양을 이전에 입혔다고 한다면 내년 1월 양산될 제품은 메탈 자체에서 헤어 라인 느낌이 살도록 고안했다. 키보드의 마감도 인간공학적으로 설계돼 편의성을 크게 배려했고, 모니터는 날 선 칼날처럼 가늘고 슬림했다.
◇사진설명: (사진 왼쪽 상단)휴대폰+리모트컨트롤+PC 일체형, (사진 왼쪽 하단)벽걸이형 PC, (사진 오른쪽)올인원PC, 삼보 디자인실에 마련된 컨셉PC들


“맥북 에어요? 못만드는 게 아니죠"
김종길 실장은 작금의 PC시장을 ‘전시상황’이라고 표현했다. 이 때문에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구분이 명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중견기업에게 가장 벅찬 상대는 유통망을 앞세운 대기업들의 ‘머니 파워’, 곧 규모의 경제다.

“애플의 맥북 에어 같은 얇은 노트북PC를 디자인 못해서 못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삼보와 애플이 나란한 기술 선상에서 제품을 생산할 때 애플은 500만대를 먼저 지르고 시작합니다. 아이폰만 1억대 팔았어요. 하지만 삼보가 국내시장 위주로 하니 20만대만 만들라고 부탁하면 OEM들은 손사래를 칩니다. 대량으로 팔아 이윤을 남기는 회사들이 수지타산에 맞지 않은 주문을 떠 안기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죠”

이럴 경우 애플이 100만원대 제품을 내놓는다면, 삼보는 이보다 30만원을 더 얹은 130만원대 제품을 시장에 내놓아야 하는 구조다. 결국 가격경쟁에서 100% 밀리게 된다는 것이 김실장의 지론이다.

김실장은 항상 자신의 팀원들에게 “최고의 디자인을 하되 최적의 프로덕트를 만들라”며 상상력의 강약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고 있단다.
◇사진설명: 삼보컴퓨터의 색색별 올인원PC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법정관리란 ‘주홍글씨’
PC시장의 업계 관계자들은 삼보가 내후년 하반기부터 정상궤도에 오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신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평가 또한 후하다. 문제는 소비자들의 뇌리에 새겨진 법정관리란 주홍글씨다. 지난 1월 삼보는 2년6개월 만에 법정관리를 마쳤다.

“이미 (법정관리를)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은 아직까지도 삼보가 법정관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죠” 김실장은 지상파TV 프로그램 ‘무한도전’ 팀이 출연하는 TV CF를 통해 어느 정도 인식전환에 성공했다고 믿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단다.

“한번 지어진 법정관리란 딱지를 때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요”

삼보 디자인팀의 인원은 총 20여명 수준이다. 이 정도 규모를 갖춘 회사는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란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줄었단 얘기다.

제조업은 한국경제를 떠받들어온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어려운 현세에 영웅이 등장하듯 다시 한번 삼보의 반전을 기대해도 될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posted by 정이있는마루